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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3-10-15 주일예배

10월 15일 주일예배(에베소서 시리즈22)
본문: 에베소서6:21-22
제목: 나의 신앙의 이름은?
찬송: 508장(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1. 신앙: 은혜에서 은혜로_에베소서1:3-14,2:1-10,4:1-16,5:1-2

• 신앙은 은혜에서 은혜로 끝나야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은혜가 완전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이 은혜의 복음을 가로 막는 영적인 존재가 있는지 역사 속에서 은혜로 시작한 복음이 항상 두 갈래로 나누어 변질됩니다. 
• 첫째는 은혜에서 행함으로 끝나는 경우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행함 즉, 은혜로 인행 우리의 삶이 변화되는 행함이 아닌 여기서 행함은 교리나 전통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때 특히 칼빈은 이 은혜의 복음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하에 수많은 교리들과 신앙의 행위들을 법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 두번째는 은혜를 팔아먹는 구원파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장사하듯 팔아먹는 것입니다. 
• 이 두가지는 교회사 속에 항상 있었던 결말입니다. 은혜가 은혜로 마무리 되는 것은 정말 은혜입니다. 
• 에베소서1:3-14에 보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찬양하는데 그 복은 우리를 하나님 사랑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 2:1-10에 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작은 사랑 아니고 큰 사랑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시고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 4:1-16에 보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냐? 단지 구원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제부터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둔 세상에 교회가 되게 하시려고 어떤 사람은 사도로, 교사로, 복음 전하는 자로, 그래서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라고 하셨습니다. 
• 5:1-2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같이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일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버리고 빛의 열매를 맺도록 빛의 삶을 살라고 가르칩니다. 
• 에베소서를 통해 주신 은혜의 복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은혜가 행함으로 끝날 수 없고, 이 놀라운 은혜의 복음이 값싼 구원론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교회가 힘써서 지켜야 할 것은 은혜가 은혜되도록 은혜가 은혜로 전달되도록 해야 합니다.우리가 사역하는 네팔에도,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의 미래에도 은혜의 복음이 되도록 말입니다.

2. 신실한 일꾼 ‘두기고’_에베소서6:21-22,골로새서4:8,사도행전20:4

• 오늘  본문에 두기고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생소하시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_골로새서4:8’
• 이 은혜의 복음을 받은 두기고는 인생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뜻밖의 유쾌한 행운,복덩이’ 라는 이름입니다. 그런 두기고에 대해 성경은 많은 간증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했던 사역을 간단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것이 당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 두기고는 바울의 3차 전도여행때 그리스에서 드로아까지 바울과 함께 한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특히, 바울이 로마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와 같은 서신을 전달하는 역할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이방 지역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보낸 헌금(연보)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된 7명 중에 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두기고는 에베소 지역의 사역자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 사실 두기고가 했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인데 성경은 두기고에 대해 잘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 그럼에도 오늘 본문과 골로새서 사도행전을 통해 그가 어떤 일꾼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 골로새서4:8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 그냥 서신서만 전달하면 될텐데 두기고를 보내면서 바울은 그를 특별하게 보냈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특별한 달란트가 있다는 것인데 아마도 두기고는 성실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서신서를 정확하게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책임감도 있었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성품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두기고를 특별하게 보낸 이유는 단지 서신서만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기록합니다. 
• 우리의 사정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서 그것을 너희에게 말해줌으로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기 때문입니다. 
• 풀러신학교의 엄예선 교수님은 한국교회가 대형화되었지만 효율적으로 지역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이유를 소그룹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구역예배나 다양한 소그룹을 교회가 하지만 그것은 제도적으로 만든 형식적인 소그룹이고, 교회안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은혜를 나누고 서로 돕고 섬기는 소그룹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몇가지 그것을 저해하는 요인을 말씀하셨는데 첫째, 가족주의 둘째,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셋째, 개인주의 마지막으로 언어라고 했습니다. 앞에 3가지는 대충 이해가 되는데 언어는 무엇을 말했을까요?
• 한국 사람들의 언어는 굉장히 공격적이고 또 상처를 쉽게 주는 언어라고 합니다. 남의 약점을 잡기 좋아하고 남을 까내리기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교하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나보다 조금만 못하면 가르치기 바쁘잖아요. 그러니 교회에서도 서열이 생기고 서로 돕고 섬기질 못한다고 엄예선교수님이 이야기합니다.
• 그런데 서신서를 전달하면서 두기고는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두기고가 어떤 성품인지, 어떤 사역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 저는 한장의 사진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큰 벽돌만 필요한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 나라에는 작은 돌조작도 다 필요하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목적 삼아야 할 것은 지역복음화나 가정복음화나 어떤 특정한 현상들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런 목적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삼아야 할 진짜 목적은 내 신앙이 어떤 신앙이 되느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일꾼이 되느냐 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 입니다. 행운, 복덩이처럼 혹은 신실하고 성실한 일꾼이라고 했던 것 처럼 말입니다. 

3. 나의 신앙의 이름은?_예레미야애가3:22-24

• 은혜가 은혜로 마무리 되려면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앞에서 내 모습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보면 힘빠지고 속상하고 포기하고 싶고 그렇지요. 
•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_예레미야애가3:2-23’
•  주전 586년 4월 9일, 바벨론의 18개월의 포위 끝에 예루살렘은 함락됩니다.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은 뽑히고, 왕자 두 명은 죽임을 당합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은 초토화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기명들도 바벨론에게 빼앗깁니다. 나름 똑똑한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고, 비천한 자들만 예루살렘에 남겨두었습니다.
• 이 기막힌 장면을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눈물을 흘리며 똑똑히 보았습니다.
• 그때의 심정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_예레미야애가 2:11’
• 나라면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이런 기막힌 상황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런데 이런 기막힌 현실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것도 예레미야서가 아닌 예레미야애가에서 말입니다.
•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라는 말씀은 인자는 헤세드인데 은혜죠. 우릴 구원하시는 은혜, 긍휼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무궁하다, 무궁하다는 것은 다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죄인에게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양적으로 질적으로 무한하고 완전하게 베풀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 예레미야는 그것을 아침마다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묵상할 때 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그냥 좋은 환경에서가 아닙니다. 
• 바울과 두기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고 두기고는 그의 동역자로 함께 고난을 당했을 것입니다. 단지 고난을 당한 정도가 아니라 험한 여정을 다 하고 에베소에 도착해서 서신서를 전달하는 데 에베소 성도들은 그에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의 신앙의 이름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나의 신앙에 어떤 별명을 지어주셨을까? 소망인가 기쁨인가 감사인가 신실함인가 위로인가...
•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의 신앙은 은혜에서 은혜로 가야 하고 은혜로 끝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죄인이고 너무 연약하고 너무 자주 넘어집니다. 험한 세상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아침마다 새은혜를 받으려고 주님을 묵상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무한하고 변함없으시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신앙생활도 신실한 일꾼이 되어 세상에 소망을 주는 이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의 매일도 우리의 아침도 우리의 신앙도 주의 은혜로 새롭고 또 새롭길 원합니다. 소망도 없었던 우리가 주의 큰 사랑으로 새사람이 되었는데 우리 인생이 끝날 무렵 참 좋은 주님의 일꾼이었다, 우리를 위로주는 행운과도 같은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찬양: 주 은혜임을+주이 인자는 끝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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