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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4-04-07 주일예배

4월 7일 주일예배
본문: 창세기6:1-22
제목: [노아1] 노아가 받은 은혜
찬송: 3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
 
 1. 사람의 죄악_창세기6:1-7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2가지 견해]
1)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라는 견해_philo,josephus,Martin Luther

-욥기에 보면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욥기1:6)이라고 표기가 된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필로나 요세푸스,마틴루터도 이 주장을 합니다. 주로 유대인들의 전승을 따라가는 학자들입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와서 마태복음22:29-30에 보면 우리가 부활하면 장가도 시집도 안가는데 천사와 같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까 영적인 존재들인데 어떻게 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할 수 있나요? 뿐만 아니라 천사가 타락해서 홍수 심판을 내린다고 하면 말이 안되는 내용입니다. 심판은 인간의 타락에 기인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은 창세기 5장의 셋의 후손이라는 견해_Augustine,Jerome,John Calvin
-두번째 학설은 5장과 연결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이라는 학설입니다. 어거스틴, 제롬, 칼빈과 같은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 가장 많이 지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인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구잡이로 결혼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주장입니다. 단순히 셋의 아들들이 가인의 딸들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노아의 홍수심판이 임했다는 것은 조금 납득이 어렵습니다. 셋의 가문에서 신앙이 없는 자녀들이 있고 가인의 후손에서도 신앙이 있는 자녀들이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단순히 그 정도만 가지고 인간을 쓸어버린다는 것은 견인교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어떤 견해가 맞을 까요? 저는 아더핑크가 주장하는 내용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땅에서 세상의 것들을 의지며 그것들을 힘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들을 대표했던 이 땅의 왕들이라고 봅니다. 
• 성경에는 이 땅의 왕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자주 표현을 합니다. 신정국가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라고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왕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재판장(출애굽기21:6)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하고 왕들을 가리키는 단어로도 쓰입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_시편2:6-7’

•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 왕의 대관식때 불렀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은 것이죠.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왕의 개념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자신이 스스로 자기 삶의 왕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자들의 모든 악한 꿈이 집약된 자리가 왕 아닌가요? 권력의 끝판왕이잖아요. 그것이 인간 세상의 왕입니다. 따라서 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세상의 것들을 힘으로 삼아 기고만장하고 살아가는 모든 타락한 인간의 대표요 상징인 세상 왕들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되는 인간들의 모든 죄는 바로 그 유일한 뿌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자기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질서를 깨버리는 것입니다.’

• 사실, 성경이 이렇게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이라고 밝히는 것은 그것이 정확히 누구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땅의 인간들인 피조물이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무질서로 바꾸어 버렸다는 것만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여기서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고, 이렇게 기록하는 데 여기서 아름다움은 토보트입니다. 즉, 토브의 여성 복수 형용사인데, 감각적으로 예쁜, 감각적으로 즐거운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감각적이다는 것은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지칭합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나 성숙함과 거리가 먼, 감각적인 섹시함을 말하는 것이죠. 당시 사람의 딸들은 이런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했다고 보는 것이니다. 
• 그러니까 당시의 네피림 시대의 죄악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왕이 되고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앞다투어 얻으려고 하는데 그런 삶들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_신명기6:5’


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_창세기6:3’

•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처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인간들에게서 떠나가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그대로 담고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인 참 성전이 그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_요한복음1:14’

•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그대로 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독생자에게 주신 당신 자신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그 아버지의 영광을 그대로 입고 재림하실 것이라고 약속까지 하셨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담고 계신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우리 주님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라, 형상이라 표현합니다. 
• 지금까지 설명한 죄악된, 타락한 육체가 되어버린 네피림 속에서, 불순종과 무질서의 상태 속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노아의 방주는 뭘 상징하나요? 바로 구원의 처소를 상징합니다. 

• 하나님의 한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악한 불순종과 무질서의 상태 속에서도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보배로운 단어가 나타나는 첫 장소입니다. 이 은혜에 대하여 성경은 놀라운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_고린도후서5:17-18’

• 예수님을 우리가 보통 영접한다고 하는데, 저는 영접기도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접은 단순히 기도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이 됩니다. 그렇게 따지면, 베드로, 바울, 뭐 모든 신약의 믿음의 인물들이 그냥 영접기도하고 구원받았다라고 기록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사역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 안에 있으면, 그분이 내 안에 있으면 이 말씀은 영접을 했기 때문에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역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생명을 뜻합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_마태복음8:1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_요한계시록7:9-10’

•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삶의 기초이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축복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고 구원받았는데, 이미 받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의 삶은 평생 그 믿음을 증명하며 살았습니다. 구원은 한순간에 시작하지만, 남은 생애 동안 유지되는 회개와 믿음의 자세가 포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 입성해야만 그것이 구원입니다. 
• 그래서 노아 자신을 홍수로부터 보전한 것은 그 자신이 가진 덕들(graces)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the grace of God)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3. 히브리서11:7에 묘사된 노아의 믿음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이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_히브리서11:7’

노아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 히브리서는 일곱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노아의 믿음의 기초입니다. ‘경고하심을 받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믿음의 기초는 감정이나 생각이 아니라, 단순한 말씀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으니라(로마서10:17)

둘째, 노아의 믿음의 영역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즉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 것을 붙잡았습니다. 신자는 보는 것을 따라 행하지 않고 믿음을 따라 행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11:1)

셋째, 노아의 믿음의 성격입니다. ‘경외함으로’ 혹은 두려움으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약속만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의 엄중한 경고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넷째, 노아의 믿음의 증거를 배웁니다. ‘방주를 준비하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2:17)고 했습니다. 생명이 없는 단지 이름뿐인 믿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믿음이 아닙니다. 

다섯째, 노아의 믿음의 결과를 발견합니다.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하나니은 항상 자신에 대한 참된 믿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이 믿음은 신약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데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사도행전16:31)’를 기억하십시요.

여섯째, 노아의 믿음의 증언에 대해 배웁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이러한 말씀을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먼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고자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죄의 반대입니다. 죄는 불법이죠. 죄는 단순한 행동 이상입니다. 하나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는 것이며,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고 그래서 영적으로 무정부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의와 주장을 따라는 왕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노아의 믿음의 상급을 배웁니다.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으니라’ 믿음은 현재적인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으로 채워지고, 생의 수례바퀴에 기름이 칠해집니다. 믿음은 상급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최고 상급은 이 땅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들어가는 기업은 지금 여기에서 소유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거류하였을 뿐입니다. 

노아에게 주셨던 은혜, 그 은혜로 가졌던 믿음 우리도 가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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