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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4-03-10 주일예배

3월 10일 주일예배
본문: 창세기3:14-21
제목: 여자의 후손이 될 것인가, 뱀의 후손이 될 것인가
찬송: 260장(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찬양: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찬양하세

1.에덴동산에서 선포된 언약

‘여자의 후손이 될 것인가, 뱀의 후손이 될 것인가’ 이 싸움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과 여자간에 싸움이 선포되었습니다. 이 싸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_요한계시록12:9’

뱀 뒤에 권세..요한계시록12장 옛뱀, 마귀, 온세상을 꿰는 자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깨고 뱀과 친하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교제라는 본질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 죄: 하나님의 약속을 깨고 뱀과 친하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되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백성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 구원: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하나님을 거부한 백성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의 방법이 여자가 뱀과 원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하나님을 거부한 백성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겠다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방법이 여자가 뱀과 원수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뱀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뱀을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배과 평화롭게 이야기하는 것을 못하게 하시므로 자기 백성을 지키십니다. 서로 적개심을 가지게 하십니다. 서로 원수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으니까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_창세기3:15’

• 적개심: 하나님은 뱀을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뱀과 평화롭게 교제하는 것을 못하게 하시므로 자기 백성을 지키십니다. 

이사람은 내 형상을 회복할 사람이다. 베드로의 믿음 떨어지는 것을 기도하셨던 예수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여자가 사탄의 백성 되지 않도록 사탄의 종이 되지 않도록  뱀과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루려 하십니다. 

2. 여자와 뱀의 싸움

여자와 뱀 사이에 싸움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여자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자기 백성 삼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선택하셨기 떄문입니다. 
이 것이 없으면 뱀과 싸울 수 없습니다. 내 백성 삼으시려고 작정하시고 삼으셨기 때문에 이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것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손떼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 문 닫으면 끝나겠죠?
왜 구원하시죠?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없는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뱀과 싸우는 것, 뱀과 전쟁하고 원수가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싸움이 후손으로 확장됩니다. 이 싸움은 후손으로 넘어갑니다.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_창세기3:15’

• 뱀의 후손(씨): 뱀에게 속한 존재, 뱀을 따르는 존재, 뱀을 말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 여자의 후손(씨): 하나님이 구원하신 여자에게 속한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말합니다. 

뱀의 말은 거짓말이라 말하고 뱀과 싸우려는 자들....에덴 동산에서 이 전쟁이 선포된 이후로 이 세상의 역사는 뱀과 여자의 후손의 영적인 전쟁의 역사입니다. 구속역사입니다. 구원역사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싸움이 바로 [구속역사, 구원역사]입니다. 
나누어짐의 역사입니다. 애굽족속과 이스라엘족속으로 나누심, 가나안족속과 자기 백성을 나누셨습니다. 가인과 아벨, 노아와 타락한 백성들, 어둠의 자녀들이 있고 빛의 자녀들이 있다고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누구나 둘중에 하나입니다. 
이 뚜렷한 구분을 잊어버리면, 교회가 승리할 수 없습니다. 구분이 사라지면 그렇게 됩니다. 
오늘 날 이 둘의 분명한 구분을, 차이를, 싸움을 희석시키면 안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알고 그 죄에 대해 자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뱀과 싸워야 구원을 얻을 것인데
꼭 교회가 아니어도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겠다? 과연 그렇습니까?
꼭 복음, 회개, 거듭남, 그런 말 안해도 윤리도덕 실천하면 세상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빈부격차가 사라지고 바르게 살면 되나요?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유주의 신학이고 변질된 복음주의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구별을 없애는 것, 이것이 뱀이 하는 일입니다. 

오늘 날 뱀의 후손과 세력들은 맹위를 떨치고 있지 않습니까?
뱀의 지배 아래 묶어두려고 하잖아요. 온갖 문화로 전례가 없이 유례가 없이 빠른 속도로 자기의 사고방식을 사람들에게 심고 있습니다. 
교회의 목사마저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목회를 하게 만듭니다. 뱀이 좋아하는 것을 노래하고 그리고 조직합니다. 
뱀이 이야기합니다. 내 말을 들으면 행복해진다고 회유하고 속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구원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집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삼으시는 일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지 못하게 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_디모데후서2:3’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군사라 합니다. 왜 군사라고 말합니까?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반쪽은 하나님께 바치고 다른 반쪽은 뱀에게 바치는 것은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여호와께서 주셨다’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가인을 낳았습니다. 
가인은 뱀의 후손이었지 않나요? 그래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사탄의 머리를 깨뜨린 것이 아니고 가인은 아벨의 머리를 깨뜨렸습니다. 
뱀이 이긴 것 같아 보이지만, 진정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사탄의 머리를 깨뜨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군중과 바리새인 종교지도자 정치인을 동원해서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이용해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가룟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아벨처럼
뱀이 승리했나요?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다!
예수님은 이 죽으심을 통해 모든 죄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할렐루야!

죄의 요구를 청산하신 것입니다. 죄의 권세,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뱀은 죄로 사람을 뱀의 후손으로 만드는데 예수님께서 더이상 죄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완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승리를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택도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모든 군대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하고 계십니다. 여자의 편이 되어서, 여자의 후손의 편에 서서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계절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느끼는데, 우리 인생은 사라지잖아요. 
하나님의 최후 승리가 멀지 않았습니다. 

3. 그러므로 믿고 바라고 구하십시요.

• 구원의 약속: 이 과업이 완성될때까지 역사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능력의 날이 교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믿고 바라고 구하십시요.
과거의 어떤 성령의 역사가 있었는지 살펴보고, 기념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교훈을 얻고 거기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역은 우리 앞에 있다고 믿습니다. 
이웃과 친구들과 가족들 가운데 아직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큰 부담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부담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직 이 세상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할 때 뱀의 권세, 마귀의 권세는 깨집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말입니다. 마이클 호튼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서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다른 것들로 사람들이 채워질 수 있지만, 사탄은 우리가 전도할때,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워 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진짜 감사한 것은 우리 청년들이 전도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토요일 가장 놀고 싶고 쉬고 싶은 날에 새벽부터 나와 전도자료를 준비하고 또 제자훈련에 참여한 성도들님과 같이 전도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한달에 한번 제자훈련 하는 토요일에 여러분도 나오셔서 함께 제자로 훈련받고 또 전도도 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그동안 성도님들에게 전도하라고 전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더 먼저였습니다.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다보니 우리가 진짜 전도하는 일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교회에서 하는 모든 중요한 일정들을 엮어 전도스텝을 밟아 가려고 합니다. 정말 기도하면서 여러분 전도하시고 여러분이 전도해서 여러분의 나눔터를 부흥시키는 기도를 시작해보시길 바랍니다. 
네팔과 같은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고 바라고 구하십시요
지금 가만히 종말을 기다리면 안됩니다. 거실에 둘러앉아 이전 세대에 얼마나 위대한 일이 일어났는지 말할때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러므로 믿고 바라고 구하십시요. 

최근에 우리를 실망시키는 교회의 상황들이 많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믿을 수 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죄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10년 전에 한국교회 지도자 10명 안에 드는 젊은 사역자가 상당수였다면 지금은 그들 가운데 절반이 그 목록에서 제외되지 않았나 싶을 만큼 복음에 대한 공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마태복음16장에서 사도들에게 하신 엄청난 약속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애쓰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_마태복음16:17-18’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래의 비전이 가득한 희망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지도자들의 자질이 아닌 약속의 확실성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우겠다.’ 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아닌 예수님의 약속이 복음운동의 토대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짋어지지 못하게 만류하는 베드로를 사탄으로 일컬으셨습니다.(마태복음16:23) 
누군가를 사탄으로 일컫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비난 중 가장 강도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충동에 이끌려 베드로의 그런 혼란스러운 행동도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교회의 희망입니다. 물론 약속의 확실성을 안일함의 빌미로 삼아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할 사람들을 선택하실때 거기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자기들을 배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예수님의 약속은 우리의 옳고 그름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희망은 지도자들의 자질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실채해도 약속은 그래도 유지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마지막 희망이 아닙니다. 그 희망은 하나님이십니다.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갑자기 줄어들거나 그분의 사랑이 갑자기 차갑게 식는 법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보좌앞에서 죄인들은 위해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성령께서 여전히 세상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세상 끝까지 구원을 베풀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여전히 그 일을 이룰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믿고, 그분이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활짝 열어 놓을 수 있느냐 입니다. 
윌리엄 캐리는 인도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지만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만큼이나 밝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굳게 세우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와 교회와 우리 자녀들의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만큼이나 밝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는 믿고 바라고 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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