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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4-04-21 주일예배

4월 21일 주일예배
본문: 창세기7:6-24
제목: [노아3] 방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찬송: 246장(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찬양: 나 가나안 땅 귀한 성에, 샘물과 같은 보혈은

1.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언약은 ‘오라’입니다. 

창세기6:13-14처럼 방주는 노아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셨기 때문입니다. 
• 홍수가 임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생각 속에 그의 백성들이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방주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 이후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 한방울의 비가 떨어지기 전에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는 것은 죄가 들어와 그것이 창조세계를 망가뜨리고 난 연후에 비로소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고자 계획하셨습니다. 그것을 노아에게 계시하시고, 그에게 다가올 심판의 폭풍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만들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방주는 노아가 고안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_요한계시록13:8’

• 방주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계시하지 않으셨다면 노아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_창세기7:1’

• 여기서 번역된 ‘들어가라’는 정확하게 ‘오라(come)'는 은혜로운 초청입니다. 가라는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함축하지만, 오라는 방주에게 하나님이 그와 함게 계실 것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 안에서 발견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 아닌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_마태복음11:28’

• ‘오라’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500회 정도 나오는데,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방주에서 초청한 첫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개인의 마음과 양심에 호소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오라’고 우리를 자신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왜 초청하실까요? 왜 방주여야만 할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여야만 할까요?

2. 방주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입니다. 

1) 방주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장소입니다. 

• ‘그 안팎을 역청으로_창세기6:14’ 칠해서 전혀 물이 새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폭우가 쏟아지고 물결이 높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방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안전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방주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의 모형이었습니다.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_골로새서3:3’

• 마치 노아가 방주 안에 감추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놓고 문을 닫으시니라_창세기7:16’

• 이것은 얼마나 복된 말씀인가요!! 노아는 자신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방주 안에서 그를 보존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책임이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피한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다_베드로전서1:5’

• 방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안전은 일 년 후 그들 모두가 새 땅에 완전하게 도착한 사실 가운데 나타납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모든 것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방주 밖으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_요한복음18: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방주는 오직 ‘하나의 문’만 있었을 뿐입니다. 

• 노아를 위한 문이 따로 있고, 가족을 위한 문이 따로 있고, 동물을 위한 문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문이 전부였습니다. 여러분 성막의 구조를 살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의 문, 장차 임할 진노로부터 피할 수 있는 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_요한복음14:6’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_요한복음10:9’

3) 방주의 구조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암시합니다. 

‘상 중 하 삼층으로_창세기6:16’

• 오늘날 4천년이 지금, 방주가 몇층으로 지어진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일층이든, 5층이든, 와 대단하다 건축기술이 끝내주네?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평상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_데살로니가전서5:23’ 

• 참 놀랍습니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 전체를 다 포괄하는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으며,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받았으며, 장차 죄의 실재로부터 구원받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상중적인 구원입니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_창세기6:16’

• 또 보십시요. 창을 내되 위에다가 내라고 명령하십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의 옆과 아래에서 펼쳐지는 멸망의 장면을 바라보아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위를 향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지요. 광야의 위험과 역경 따위에 매몰되는 대신, 눈을 들어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광야같은 세상을 지나는데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우리 마음과 생각이 항상 위의 것을 바라봐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_골로새서3:2’

3. 방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마지막으로, 방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방주는 고페르 나무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청을 바르라고 합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을 칠하라_창세기6:14’

• 여기의 ‘역청’을 위해 사용된 히브리어는 ‘제테트’가 아니라, 구약에서 70회나 ‘속죄하다’로 번역된 ‘카페르’입니다. 카페르의 일차적인 의미는 ‘덮다’이며, 그것이 여기 이외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역청’으로 번역되지 않습니다. 

• 속죄는 죄를 덮는 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_하박국1:13’

• 그러므로 죄는 덮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죄는 피로 덮어져야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보혈의 피는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우리 죄인은 주님만이 피난처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_로마서3:25’

[나 대신 예수님이]

• 방주는 내 삶에 지어야 할 구원의 은혜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견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_로마서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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