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주일예배
본문: 창세기19:12-29
제목: [아브라함6] 무심코 하는 일
찬송: 430장(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지난 설교 생각하고 질문하기]
소돔이 멸망한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
그 속에 살았던 롯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었나요?
:
제가 이번 주에 기도하던 중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에 체육대회를 합니다. 주사랑교회랑 연합해서 하면서도 청소년무브먼트도 초대하고 작은 개척교회도 초대하여 함께 합니다. 우리 그 일의 소중함을 아는 스텝들이 정말 수고해주고 또 헌신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도 후원도 많이 해주시고 하니 연합하여 교제하는 즐거움을 위한 체육대회가 되면 그정도도 성공이죠.
그런데 제 마음에 그것만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나님의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교회가 선교적교회로, 홀로 앉고 둘러앉고 마주앉으면서 가려고 하는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잖아요.
그 일을 위해서는 단지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이 시대에 타락한 영혼들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워지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교회가 왜 타락한 교단을 나와서 좋은 교단에서 좋은 분들을 만나려고 애쓰냐면 그냥 편하게 남들이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 정도에만 머물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복음에 굳게 서는 일에 영적인 감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앞에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일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나, 그것이 가장 큰 죄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주 예수를 사랑하고 그 은혜를 받았는가 질문하면 다들 예라고 말하지만, 정말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우리가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내 허물을 지적하면 화가 나고 내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분노가 나고 그런 이유가 이미 받은 은혜를 받는 것이 거짓이기 때문이겠죠.
독생자 예수를 받아놓고 왜 마음에 더 갈등이 심하고 더 하나님께 섭섭하고 그 이유가 무엇일까?
실제로 은밀한 죄, 육신적인 욕구를 억제할 수조차 없는 것은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나? 왜 우리를 거짓말쟁이라고 하나?
저는 한주에 하루는 진짜 하나님앞에 엎드리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쟁이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생명의 복음을 정말 사랑하고 그 은혜로 이 자리에 있다고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이 진심이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_고린도후서6:1”
1.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롯은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니까 천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롯이 그 동안은 말을 못했지만 이제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겨서 그것을 설득하고 설명하고 기다려주지 않으신 것 처럼 보입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_창세기19:15’
사람들은 세상의 속도에 맞춰서 움직이지만, 천사들은 ( 하나님의 시간, 때)를 알기 때문에 재촉합니다.
결국, 사위들은 구원(건지심)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순간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구원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2. 무심코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_창세기19:24’
사실, 소돔에 유황과 불로 심판을 내리시는 것은 갑자기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구해야 할 백성들 때문에 심판을 지체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랜 시간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롯과 아내, 두 딸이 도망쳐 나오지 않습니까? 천사들이 재촉해서 롯이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급하게 나옵니다.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십니다. 멀쩡한 도시에 갑자기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립니다.
마치 노아의 배를 타자 마자 홍수가 시작된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종말이 이렇게 갑자기 옵니다.
우리의 죽음도 갑자기 옵니다.
우리는 갑자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누군가의 기도로 누군가의 복음 전파로 우리가 또 이렇게 은혜를 받고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롯의 아내의 일입니다.
롯의 아내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어버립니다.
무심코 돌아봤습니다. 습관처럼, 아쉬운 마음에, 소돔이 너무 좋았는데 이런 마음에 뒤돌아봤습니다.
그것은 롯의 아내와 두 딸은 평소 성문과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보면 롯의 딸들도 소돔에서 행했던 습관처럼 소알에서 자녀를 낳습니다. 그 자녀들이 모압과 암몬 즉, 정말 하나님을 대적하고 믿음의 사람들을 괴롭힌 죄의 열매들입니다.
사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요? 몸은 애굽에서 나왔는데 여전히 마음은 애굽에 있길 원했잖아요.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오늘 27절에 보면 을 아브라함은 소돔을 보았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본 것은 지난 날 믿음의 선택에 대한 확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_창세기13:10”
소돔은 원래 여호와의 동산 같았고 애굽 땅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멸하시기 전에는 정말 좋은 도시였습니다. 누구 눈에요? 롯의 눈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때도 육신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소돔이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는 광야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종을 택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받고 싶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_창세기19:28”
소돔을 어디에서 봐라보죠?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서 바라봅니다. 그러니 롯의 아내처럼 소돔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3. 심판도 무심코 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_누가복음17:27-30”
우리도 언젠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합니다. 심판이 홀연히 임하게 됩니다.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삶의 거처를 정했고,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살다보니, 점차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들처럼 무심코 살아가게 됩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살면 우리는 죄의 열매로 가게 됩니다.
구원은 죄에서 ( 건짐받은 )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지신 것입니다. 그걸 알면 우리 삶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겠죠? 아니 더이상 죄를 두려워하거나 혹은 죄와 친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삶에서 벗어나고자 간절히 기도하고 그 삶에 있는 우리 가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것이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_시편139:23-24”
그렇기 때문에 우연히 구원받은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영혼 구원하시려고 전부 계획하셨습니다.
신앙은 분명한 목적이 있고 또 방향이 있습니다. 그 방향대로 성장해야 합니다.
건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때론 지루하고, 때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사건을 만나기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하고, 견디어야 하는 한걸음이기도 합니다. 또 넘어짐이기도 합니다.
그럴지언정 다시 돌아감은 없습니다. 다시 악한 길로, 죄악의 길로, 타락의 길로 돌아간다는 것은 건짐받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롯의 사위들이나 아내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라, 롯처럼 성문에서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아니라, 더 즐기지 못해 더 타락하지 못해 아쉬워서 안타까워서 뒤돌아보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무심코 죄를 짓고, 무심코 뒤돌아보면 무서운 결과들을 초래합니다.
그와 반대로 무심코 찬송하고, 무심코 예배하고, 무심코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살때 무심코 신앙의 열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오랜 세월 힘겹게 싸웠던 믿음의 싸움으로 이제는 무심코 죄를 짓는 삶이 아니라 무심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하는 삶이 된 것입니다. 무심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구원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하셔서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의 성숙까지 성장합니다. 우리.
생각해보십시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기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 말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분명한 목적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방향도 과정도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내 신앙생활의 목적은 ‘사명’입니다. 그 사명이 우리의 삶을 이끕니다. 그 삶이라야 우리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주일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06-16 주일예배 (0) | 2024.06.16 |
---|---|
2024-06-09 주일예배 (1) | 2024.06.09 |
2024-05-26 주일예배 (0) | 2024.05.26 |
2024-05-19 주일예배 (1) | 2024.05.19 |
2024-05-12 주일예배 (0) | 2024.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