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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찬양예배

2015-10-30 금요예배


2015-10-30 금요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2015-10-30 금요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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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러한 것들을 구분짓게 하는 논리들을 보고 철학이라고 합니다. 시대의 철학이 있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도 자신만의 철학이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자들처럼 말과 글로 구체적인 표현을 하지 못할 뿐이지, 누구나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시대는 쉬운 것을 선호하는 시대입니다. 심플한 것을 좋아하죠. 심플하면 대부분 아이폰, 잡스가 생각날 것입니다. 잡스는 심플철학을 사회적 가치로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점차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러한 철학의 영향으로 심플한 것을 추구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제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대부분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생활도 쉽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 빠지고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성공이라고 합니다. 때론 전도를 많이 하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서 헌금 많이 하면 신앙생활 잘한다고 믿음 좋다고 합니다. 이것들은 쉬운 신앙생활이며, 자신만을 위한 신앙인 기복신앙입니다. 복을 기준 삼은 쉬운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쉬운 신앙생활입니다. 칼빈은 성경을 버리고 계시와 현상 따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을 광신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경건의 원리를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려운 신앙생활인가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단순하게 공식처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말씀을 말씀 그대로 믿고 내 삶에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신앙생활이 아닐까요? 오늘 이사야의 소명장, 부르심을 받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소명을 붙잡길 원합니다.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_이사야6:1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_이사야6:1 ’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대면 한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본즉’ 높이 늘리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계속해서 제가 설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신학적으로는 신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내 지식, 머리, 가슴으로 한정짓는 하나님이 아닌, 말씀으로 자신을 표현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되길 바랍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하나님을 3가지 구분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참 좋으신 하나님_누가복음11:11-1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성경에 계시된 오직 한분이시고 살아계신 진리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은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신학을 살펴보아도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개혁주의로 구분되는데, 제가 생각 할 때는 믿는 하나님이 다른 것 같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만을 믿는 것입니다. 신정통주의는 인간이 믿을 수 있는 지식의 한계에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자유주의는 믿고 싶은 하나님을 믿는 신학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내가 믿을 수 있는 만큼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대로만 하나님을 알고 믿고 예배하길 원합니다. 성경에서 그 하나님을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신앙의 위인들이 고백하고 기록한 성경속의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늘 어려움과 핍박, 갈등이 있지만 결론은 감사와 찬송의 고백을 드립니다. 긍휼이 많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어 상 주시기 까지 하십니다. 항상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기다려주십니다. 내 생각과 마음, 행동, 삶을 하나님의 강력한 힘으로 조정하지 않으십니다. 로봇처럼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아빠 아버지처럼 설명하시고 조언하시고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_누가복음11:11-13’

2) 사랑의 하나님_요한일서4:16,여호수아23:11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 사랑은 독생자를 내어주실 만큼, 자신을 내어주실 만큼 큰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상상치도 못할 사랑의 크기입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실감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지 측량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지구 안에 살아가는데, 지구의 자전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인생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 된 나를 용서하시고, 의인이라 칭하시고 항상 함께 하시길 원하십니다. 사랑받는 자는 행복합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는 늘 외롭고 지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매일 나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이제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안에 거하길 바랍니다. 예배할 수 있는 가스펠 성도님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믿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_요한일서4:16’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_여호수아23:11’

3) 공의의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지만, 죄를 미워하고 징계하며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공의의 하나님을 나쁘다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공의’를 인간의 머리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계시로써 공의의 하나님의 속성이 인간에게 투영된 것이 도덕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에게 있는 최소한의 양심이 존재하여,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법을 만들고 공동체의 울타리 최소한의 규범들을 만들고 지키고 살아갑니다. 공의는 선악을 구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법, 공법대로 세상을 운행하십니다. 공의로우신 주님을 알고 경외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의 경건의 모양입니다. 신앙생활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분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믿고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고 앎이 있어야 바른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_미가3:8’

2. 하나님의 임재_이사야6: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_이사야6:2’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신앙생활을 할 때 비로써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셔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늘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모세에게는 떨기나무 사건을 통해서, 대제사장들은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성령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자기의 발을 가리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수치심과 두려움이 드러나 숨겼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면 우리는 한 없이 나약하고 죄인의 모습들이 낱낱이 공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르짖고 진실되게 하나님을 찾을 때면, 우리의 약함 때문에 눈물이 나고 두려워 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떳떳하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진실되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 믿을 수 있는 하나님만 믿는 다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부끄럼이 없을지 모릅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_시22:6’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_욥13:28’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벌레라고 표현합니다. 욥은 자신을 썩은 물건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두려움과 경외가 생겨나고, 당연지사 세상 만물의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는 축복은 전부 하나님께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만나는 시간이 묵상일기를 작성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철학과 지혜, 가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강단 말씀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지식에 무지하고 무식하기에 매일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고 기록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예배하는 이 시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간구하는 유일한 시간일 것입니다. 간구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_시145:18’

3.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

묵상일기는 곧 묵상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무엇을 묵상 합니까? 강단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고 듣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전부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한 스토리입니다. 묵상은 스토리의 주인공인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임재하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임재로 하여금 나는 완전히 그분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때 비로써 회개하게 됩니다. 죄인이 취조실에서 경찰 앞에 모든 증거들이 제시된다면, 어찌 더 이상 거짓말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빛입니다. 묵상의 시간을 갖고 나면 무언가 모를 힘과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묵상의 내용이 우리의 나약함, 게으름, 죄 덩어리라도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이야기 할 때 새로운 힘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 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살다보니 무지와 악의에 의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람의 무지와 헛된 지식들이 하나님을 모르게 합니다. 어떤 이들은 외식하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척하며 존재는 부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긴 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사랑이 믿어진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복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생길 때 비로써 나를 아는 지식이 생겨납니다. 나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내가 왜 이런 모습인지, 우리 가정은 왜 이런지, 내게 주어진 갈등, 문제가 왜 주어졌는지, 점차 해답을 찾게 됩니다. 사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해답일지 모릅니다. 복음을 알게 되면 해답이 발견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짐승보다 월등하게 창조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이유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통해서만이 사람은 불멸을 사모하게 됩니다. 내세의 심판 날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을 믿고 살아가게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 지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천국 비밀을 믿고 소망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려운 신앙생활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_사6:9’

오늘 이사야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알게 되었고, 비로써 소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보는데도 알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긴 시대에 이사야에게 그루터기를 보게 하셨습니다. 이사야가 해야 할 일을 보고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인된 우리를 기다리시고 용서하신 주님,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을 향하길 원합니다. 내 생각, 이 시대 문화속의 하나님이 아닌, 성경속의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믿길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과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내려주세요. 오늘 이 시간 성령의 내주, 인도, 충만함을 체험하게 해주세요.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내가 해야 사명을 발견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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