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금요찬양예배

2017-04-28 금요찬양예배

2017-04-28 금요찬양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2017-04-28 금요찬양예배.hwp



음성다운로드: http://bit.ly/2pb7Uug




20170428일 가스펠교회 금요찬양예배

제 목 :

(소요리문답강해19) 인간의 고통과 비참

본 문 :

갈라디아서 3:10

임대영 목사

19문 타락한 상태의 인간의 비참이 무엇인가?

: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진노와 저주 아래 놓였다. 이로써 이생에서 온갖 비참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누리게 되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_갈라디아서3:10

 

성경에서는 인간을 두 분류로 늘 나누어서 이야기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자와 율법에 속한자, 저주 아래 있는자로 구별합니다. 소요리 문답강해 19문답에서는 더 자세하게 불신자와 신자의 구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_로마서8:22’

 

사실 모든 인류는 버려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18문답처럼 인간은 사실 악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 관심 피하기 위해 인간의 설명, 인간적인 철학과 사상, 이를테면 진화론으로써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_로마서1:18’

 

하나님이 계시하신 모든 말씀들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문자적으로 이 진리를 피하기 위해서 자신을 속여야만 합니다. 그러한 인간의 노력은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더욱더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의 비참은 진리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의 노력으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 불신자: 타락한 인간

 

소요리 문답에서는 불신자의 상태,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비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비참은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찍함이라는 단어입니다. 고통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공허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진노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하셨을 때, 영생을 향한 능력과 필요를 가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과 함께 이 능력은 더 이상 완전하지 못하게 된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이 안식하지 못하고 공허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공허는 하나님 말씀으로 창조된 최초 인간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어 생기게 된것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_전도서1:2’

 

전도서의 한 장 전체가 공허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바꾼다면 공허하고 공허하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라는 말입니다. 허무하고 허무하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그리스도로 구원의 지식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삶은 마음의 채울수 없는 빈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 빈 공간을 채워질수가 없습니다.

 

우매한 자들의 웃음 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가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_전도서7:6’

 

불신자의 웃음은 금발 끝날 웃음이라는 말입니다. 불신자의 행복은 아주 잠시 잠깐이라는 말씀입니다. 큰 명예, , 인기를 얻고서도 삶을 포기하는 이유는 전부 공허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영원하신 하나님이 자리해야 할 마음의 장소에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하니 얼마나 채울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상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2. 현실의 고통과 아픔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_욥기5:7’

 

공허와 더불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현실에 비참, 고통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간의 현실 고통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질병, 기근, 전쟁, 재난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이런 문제가 다가오는 것은 늘 시간의 문제일뿐입니다. 누구도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_시편73:5’

 

물론 우리가 볼 때 이러한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욥처럼 경건한 사람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평안해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결론내리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악인의 일시적인 축복은 분명 그 인생을 더욱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반대로 의인의 순간적인 고난과 시련은 결국 선한 길로 인도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인간에게 이러한 현실의 문제, 고통, 비참이 보편적이다는 사실입니다. 소요리 문답이 작성된 17세기부터 오늘날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도 겪었던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현실은 고통과 아픔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3. 죽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_히브리서9:27’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_로마서6:23’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음을 빛이라고 죽음을 자연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죽음은 죄의 삯이고, 인간의 비참, 고통의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늘 모든 인간의 죽음에는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4. 심판이후 지옥

 

불신자에게는 영원한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차후에 더 자세히 다뤄집니다. 죽음이후 지옥에 대한 진리는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가르치신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다른 성경 말씀처럼 선지자나 제사장들을 통해서 기록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진리의 말씀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_마태복음3:12’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_마가복음9:48’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_요한계시록14:10’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_마태복음8:12’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_마태복음25:46’

 

 

. 구원 받은자: 구원에 참여 한자

 

아담의 불순종, 원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비참한 고통의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불신자들과 다른 신분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불신자와 신자는 어떤 점이 다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다시 교제할 수 있는 신분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인인 인간은 절대 스스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되십니다. 그때 비로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신자에게서 제거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문제,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사함 받게 된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모든 심판을 다 받으셨기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실 것을 두려워 않게 된것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죽음의 공포, 영원한 형벌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인간의 비참과 고통의 상태에서 건짐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자가 완전하고 온전하게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악하고 여전히 약하기 때문에 수많은 어려움을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신자도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_히브리서12:6’

 

신자의 삶에도 여전히 질병과 슬픔, 현실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신자의 것과는 다릅니다. 신자의 이런 문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표현이 아닌, 바른 교육으로 구원에 이르기 위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죽음에서 생명으로

 

신자와 불신자와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죽음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그의 영혼이 이미 사망에서부터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 할대, 영혼이 이미 죽음의 능력으로부터 빠져나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를 어떤 것도 분리 시킬 수 없습니다. 단지 육신만이 죽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 그날까지 한동안만 죽음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땅에 오실 재림의 날, 그 육신도 생명을 얻어 부활하게 됩니다.

 

반면 불신자의 죽음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신자의 죽음은 육체와 영혼 모두에 해당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육신은 살아 있을지 모르나, 그 영혼은 이미 죽은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불신자의 영혼은 영원히 죽음의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진노는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커지게 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_에베소서2:1’

 

3. 완전한 행복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_누가복음12:4-5‘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_마태복음10:28’

 

마지막때에 모든 인류가 일반적인 부활의 때가 돼서야, 비로서 신자들은 모든 비참과 고통에서 건짐을 받아 완전한 행복에 참여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우리의 영육이 완전한 생명으로 완전한 행복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불신자의 영육 또한 완전한 비참과 고통속으로 넘겨지게 됩니다.

 

성경의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탐구하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도 빠짐없이 성취될 진리의 약속이자 사실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떠난 인간, 불신자에게는 죄로 인한 죄, 저주, 운명 사주팔자가 사로 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본래 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불신자는 공허, 현실의 고통, 죽음,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자들에게는 하나님과 교제 할 수 있는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도 현실에서 살기 때문에 고통과 비참이 존재 합니다. 하지만 불신자의 고통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자녀가 곁길로 갈때마다 문제와 고통으로 바른 길로 향하길 원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오늘로 결과가 바뀌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앞에서 평가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포기하지않고, 낙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늘 기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표지판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전도와 선교에 사용받는 신앙생활로 발을 내딛어야 합니다. 오늘의 현실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불신자와 별반 다름없어 보이게 하고, 문제와 현실속에 빠지게 만듭니다. 속으면 안됩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방향을 잡으시길 바랍니다.

 


'금요찬양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05-12 금요찬양예배  (0) 2017.05.12
2017-05-05 금요찬양예배  (0) 2017.05.05
2017-04-21 금요찬양예배  (0) 2017.04.21
2017-04-14 금요찬양예배  (0) 2017.04.14
2017-04-07 금요찬양예배  (0) 2017.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