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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3-09-03 주일예배


9월 5일 주일예배(에베소서 시리즈16)
본문: 에베소서5:21-33
제목: 교회에 요구하시는 복종
찬송: 90장(주 예수 내가 알기 전)

1.주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에베소서5:21)

• 주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한참이나 기도하고 공부했습니다. 제가 사실 여러분에게 많이 죄송한 것이 있는데 제가 이렇게 목회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안다고요? 내 자신도 잘 모르는데요. 그저 은혜로 믿어질 뿐이예요. 그래서 믿음을 선물로 받은 거죠. 그 믿음으로 더 알고 싶을 뿐이고요. 주님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더 자세히 잘 알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거짓일 수 있어요.
• 제가 예전에는 그렇게 했죠. 전도사때 또 막 목사가 되어서 설교하면서, 복음전하면서 그 내용을 제가 완전히 다 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상대방을 완전하게 이해한다고 착각했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그런 저의 메시지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아니잖아요. 지금 제 설교가 어려운 이유는(사실 익숙하지 않아서) 제가 몸부림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전도사때 설교한 것을 기억하시고 목사님 그때처럼 포인트를 딱 찝어서 해주시면 안되냐고 한 분도 계십니다. 그땐 그랬죠. 그땐 제가 자기 계발서 책 많이 읽을 때 입니다. 성도들이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도록 섬기는 사역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해는 되지만 예전처럼 못합니다. 
• 설교하면서 설교 한편 딱 듣고 손에 한주 붙잡고 살아갈 것 쥐어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저도 손에 쥐어지지 않아요. 저도 겨우 예배드리고 성경말씀묵상하면서 죽도록 죄와 싸우면서 있는 힘껏 기도하면서 그렇게 주님께 가까이 가고 있는 걸요. 
• 그런 제 모습에 솔직하면 실력없는 목사, 능력없는 목사가 된다는 것도 잘 압니다. 대부분 무시합니다. 목사님이 밖으로 돌아다니고 강의도 하시고 좀 유명한 목사님 되면 좋겠다는 분도 계시니까요. 우린 그걸 대리만족을 느끼기도하고 그렇습니다. 그것 자체가 틀린 것도 아니고요.
• 그런데 지금이 10년 전보다 훨씬 행복하고 좋아요. 훨씬 더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삶은 더 성실해졌고, 더 진실해졌으며, 더 밝아졌습니다. 거짓이 사라졌어요. 그래서 10년 전, 20년 전보다 더 좋은 목사가 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반대로 느끼시는 거죠. 제가 감추고 살지 못해서.
• 21절에 주님을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21절을 다시 보냐면 21절의 복종이라는 단어를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 하나의 큰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게 된다고 합니다.
• ‘복종’이란 단어는 부정적인 인식을 줍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싫든 좋든, 굴복해야만 하는 것 같아 힘듭니다. 복종하면 왠지 손해를 보는 것만 같아 무언가 억울한 감정이 듭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은 그런 복종이 아닙니다. 원어적 의미는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상대방 보다 밑에 두며 섬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의 한 요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충만과 경외 그리고 복종은 하나의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설명을 하는 것 중에서 오늘 첫번째 부부관계인 것이죠.

2. 복종을 가정으로 비유해서 설명하시는 이유(에베소서5:22-33)

• 왜 부부관계일까요? 베드로전서에도 골로새서에도 부부관계는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조직이 가정이고 부부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가 들어와서 가장 먼저 깨진 것이 가정입니다. 가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깨졌고, 창세기 4장에는 가인과 아벨 즉, 형제관계가 깨졌습니다. 에덴동산과 같이 완벽한 환경에서 말입니다. 
• 영적인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을 가정에서 회복하기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 그래서 ‘복종’ 성령충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가장 아름다운 회복의 열매입니다. 피차 복종하라!
• 피차 복종하는 열매를 맺으려면 부부사이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 첫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23절에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남편이 개똥같은데 어떻게 남편에게 복종하냐고 생각이 드실 것같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런 죄인으로 엉망이 된 남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주시면서 가정의 리더쉽을 남편에게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남편의 영적인 권위가 대단합니다.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라든지, 자녀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한다든지 전적으로 남편의 역할입니다. 심지어 유대인은 결혼을 하면 남자들이 1년을 쉽니다. 왜 쉬나면 성경을 가르칠 교사로 훈련받도록 그런 특별한 기간을 가집니다. 결혼을 해서 가장이 되면 성경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하기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저는 유대인 문화를 공부하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 한국교회는 남자들이 대부분 여자들에게 끌려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남자들이 그만큼 믿음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죠. 이유가 뭘까요? 2018년 나온 목회와 신학이라는 저널에게 한국 교회(교회 장로, 집사, 권사를 대상으로) 예배 외 경건생활 즉, 기도시간, 성경공부, 전도훈련 받는 것이 여자는 평균 7-10시간인데 남자는 평균 1시간이 안되는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성분들이 남편 핀잔주고 했냐 안했냐 잔소리하고 그러잖아요 ^^; 영적인 권위가 어디 있나요?
• 그렇지만 성경은 가정의 리더쉽을 남편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권위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신앙생활 잘하도록 세워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들에게도 아내 자신에게도 훗날 우리 후손들에게도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남편이 신실한 신앙인이 되도록 기도로 복종해주세요. 
• 두번째는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참 신기하죠 남편에게는 복종하라고 해놓고 아내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복종보다 사랑이 더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지신 것, 죽으신 것, 그 엄청난 희생이 사랑이잖아요. 사랑은 그래서 복종의 또다른 말이고 또 더 깊고 넓은 의미의 말이 아닌가요. 왜 이렇게 사랑하여야 하는가? 27절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28절에는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9절에 누구든지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말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육체니까요.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을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누구라도요. 
• 여러분 우리는 공부를 못하면 미워하고 등신같다고 하지만, 사실 공부잘한다고 무조건 잘살고 못한다고 무조건 못살고 그러지 않잖아요. 인간의 지문, 홍채가 같은 게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전부 우리를 각각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나와 조금만 다른 사람이 와도 경계하고 문제 있는 사람이 오면 버티질 못합니다. 그만큼 사랑이 없는 곳이 되어버렸어요.  
• 예수님이 일만달란트 비유를 드셨잖아요. 평생 일해도 못 버는 액수입니다. 수억, 수십억 빚진자인데 주인이 그걸 탕감해주셨어요. 그런데 겨우 몇백만원 빚진자를 탕감해주지 않아요.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셨는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견디지도 못하죠. 성경은 구원파처럼 구원받았으니 끝의 개념이 아니라 일만달란트빚은 졌지만 우리가 그걸 탕감받으면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빚진자로 살죠. 그것이 감사함이고 감격이고 찬송이잖아요. 그래서 몇달란트 빚진자도 탕감해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선민이 되었는데 새리는, 창녀는, 심지어 이방인들 모두를 구원받지 못할 자 취급했어요. 여러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주셔야 합니다. 아내를 무시하거나 못살게 구시면 안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3. 주안에서 갇힌 자가 되어야 합니다.(베드로전서3:1-7,사무엘상1:9-11)

• 복종은 갇힌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서로 갇힌 자가 되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는 갇힌 자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교회에게 스스로 갇힌 자가 되어주셨습니다. 
• 베드로전서3:1-7에 보면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그 순종이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앞에 값진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복종하는 것은 외모로 하지 말고 마음으로 온유하고 심령 즉, 영혼과 마음이 썩지 아니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늘 깨끗하게 우리 마음을 온유함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이 다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 은혜를 받으라고,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신앙의 목표는 전도나 어떤 응답이 아니라 거룩이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거룩 말입니다. 7절에는 남편들은 아내와 동거하라고 합니다. 동거가 갇힌 자잖아요. 이 말은 단순한 동거가 아니라 함께 생명의 은혜를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진짜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합니다. 
• 기도가 막힌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할 삶을 못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무엇인가로 빼앗겨 기도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지식으로 하거나 경험으로 하거나 자기 생각대로 한다면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기도하십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이렇게 빨리 식어버린 이유가 남자들의 기도생활이 없어서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정과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그것은 마치 여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겼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줄 영적인 권위도 없습니다. 
• 그것은 주님께 갇힌 자가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돈에 갇히고 세상에 갇히고 사상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셔야 합니다.
• 사무엘상1장에 보면 한나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에 애굽에서 노예생활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 내어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엄청난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엄청난 정복전쟁을 치르고 난 후 다음 세대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사들을 세워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에 한나라는 여인이 늘 성전에 가서 예배하는데 마음이 괴롭습니다. 남편은 가족들은 아이가 없어도 기도하지 않는데 한나는 아이가 없어서 괴롭습니다. 그 괴로움이 단지 한 여인의 괴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마음에 주신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한나가 성전에 가서 기도하죠.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시면 나실인으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 주의 종으로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기도하는지 당시 타락한 엘리 제사장은 한나를 보고 술에 취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어난 인물이 사무엘입니다. 그냥 고통을 주신 거 같지만 사사시대를 종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할 하나님 나라와 왕을 세울 사무엘을 주시려고 기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고통으로 주님께 갇힌 자가 된 것입니다. 
• 하나님이 이번에 우리교회에 어려움을 주셨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인간적으로 풀려고 풀려고 해도 같은 문제가 반복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게 하시려는 사실을, 교회는 기업이 아니잖아요. 교회는 봉사단체도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봉사도 하고 운영도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기업도 봉사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 당신의 일터입니다. 교회에 갇혀서 사는 것이 싫다는 것은 주님께 갇힌 자가 싫다는 것입니다. 
• 주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말입니다. 주님께 복종할때 또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 우리는 신비한 열매를 맺게 될 거예요.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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