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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3-12-17 주일예배

12월 17일 주일예배
본문: 빌립보서2:19-30
제목: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찬송: 342장(너 시험을 당해)


1. 디모데_빌립보서2:19-24,디모데전서6:20-21,디모데후서1:3-6,4:9-18

오늘 본문에 두 인물이 나옵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사실 두 인물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인물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디모데는 바울의 직속 후계자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주후 48년에 루스드라에서 만난 사람인데 그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들었지만, 이미 모친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로부터 성경을 배워 원래부터 경건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목사로 안수를 받아 바울과 함께 소아시아, 헬라, 마게도냐, 로마 에서 순회 전도 사역을 감당했고 바울과 함께 감옥에도 갇히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에베소교회를 담임하여 목회를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이런 디모데를 오늘 본문에 보니 빌립보교회로 급히 보냅니다. 왜냐하면 디모데가 지금 바울의 사정을 가장 잘 전달할 적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를 올바르게 사역을 해줄 수 있는 목회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은 의도적으로 디모데의 연단을 이야기합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디모데는 매우 어렸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소심하고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의 후임으로 목회를 할때도 그의 소심함으로 매우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 편지를 써서 격려합니다. 
‘디모데전서6:20-21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이 말씀은 당시 교회에 엄청난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거짓 선지자로 가르키는 데요. 디모데가 많이 흔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1:3-6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바울은 디모데가 다시 하나님의 은사를, 어릴 때부터 가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일깨워주려고 편지를 쓰고 또 그를 만나길 고대했습니다. 
‘디모데 후서4:9-18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이처럼 초기 기독교에서 훌륭하고 대단한 목회자였던 디모데도 연단을 받아 성장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나이가 아니고 연단이고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성경 교육의 기초 위에 경험되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런 디모데가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지도가 가장 컸기 때문입니다 
바울 역시 12사도들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했고 오히려 스데반을 죽이는 현장에 앞장선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회개하고 돌아왔다 하더라도 초대교회에서 쉽게 받아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평생 스데반이 그의 아픈 트라우마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다 준비된 스데반은 불러가시고 오히려 핍박자 사울을 변화시켜서 이방 선교에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스데반과 같은 사람은 이방인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이 디모데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어쩜 당연한 것입니다. 

2. 에바브로디도_빌립보서2:25-28,고린도후서12:7-9

저는 그 증거가 에바브로디도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빌립보서에만 나오는 인물인데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에서 바울을 도우라고 바울을 섬기라고 보낸 일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로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심부름이냐, 빌립보교회를 사역하기 위해 보내냐, 아닙니다. 왜냐하면 앞에 디모데를 그런 사역자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에바브로디도에게 큰 결함이 있다고 봤습니다. 26절에 보면 그가 병들었다고, 27절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육신적인 연약함이 결정적입니다. 그런 그를 다시 돌려보내면서 바울은 25절에 그가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했고 군사된 자라고 칭찬합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교회를 사모한다고 기록합니다. 
빌립보교회 입장에서는 바울을 섬기라고 도우라고 특별히 뽑아서 보냈는데 다시 돌아온다면 ‘네가 건강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가서 바울도 돕지 못하고 이렇게 돌아오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신학적으로는 정통을 따릅니다.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으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 신앙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역은 급진적입니다. 팀켈러 목사의 목회를 배우고, 레슬리 뉴비긴이 말한 미셔널처치를 따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제가 교단을 옮기려고 할때 어떤분이 지속적으로 저에게 연락이 오셨는데 이유는 개혁주의교회로 가라는 것입니다. 고신이나 합신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합동도 타락했고 백석도 문제가 많다는 투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는 이래서 안되고, 저기는 저래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단이나 사이비를 정할 때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이 그런 상황으로 왜곡되어서는 안됩니다. 독일 나치들에 대해 저항하면서 생긴 고백교회라고 있는데 나치가 사라지고 나중에는 자신들이 누구이며 누구를 섬기도록 되어 있는지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오직 나치에 대한 저항으로 생긴 전통이 우선시 되고 나중에는 자신들의 교리만 맞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인종차별과 민족주의 신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오류를 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
-루퍼투스 멜데이우스

교회를 세워가다보면 교회안에는 저와 같이 연약한 분들이 많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또 그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분들입니다. 그렇죠?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예수님을 따라 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문화와 이 도시, 이 지역의 상황은 시시각각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배워야 하고 서로 존중하며 배려하면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믿음이 견고해지되, 결코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통해 공동체를 통해 연악하지만 믿음이 더욱 자랄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모든 나라와 가족을 덮치는 불행의 가장 주된 원인은 바로 교만이다.’_c.s. 루이스

저는 어제 청년 임원들이 꽃전도를 준비하는 모습을 잠깐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참 좋다. 예전에는 이런 노방전도는 수준 낮은 전도라 생각했는데 청년들이 함께 준비하면서 행복해하고 서로 교제하는 모습만 봐도 너무 좋았습니다. 오늘도 추운 날씨지만 2부 예배가 끝나면 이 지역을 둘러보려고 합니다. 처음인 거 같습니다. 저는 사실 엄청난 전략 메시지 대단한 교회에 대해 공부하면서 살았지만, 정작 이 건물에 거주하는 이웃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낼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대단한 사람인 것 처럼 하고 다녔지만, 내 사랑하는 성도들의 아픔을 감싸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못하고 살았습니다. 

‘고린도 전서12:7-9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말씀을 따라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기도 하시고 각양각색의 은사를 주시는데, 이것이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3. 교회와 성도의 소명: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_빌립보서2:29-30

29-30절에 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육신이 연약하여 바울과 함께 동행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에바브로디도는 디모데처럼 훌륭한 목회자는 못되었을지라도 그의 삶이 하나님께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빌립보에서 기쁨으로 환영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빌립보의 모든 성도들은 그 누구도 바울과 동행해본적도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후회가 있다면 시도해보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만 하고 말만 하고 그러니까 개혁주의 책 한두권 읽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한 조각을 맡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말입니다. 

‘모든 교회는, 아무리 작고 약하더라도, 복음을 땅끝까지 가져가는 과업의 일부 몫을 나누어야 한다. 모든 교회는 선교들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의 온전함의 일부다. 만약 우리가 오직 우리의 이웃들 사이에서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충분히 고백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땅끝까지 그분을 고백하고자 해야 한다. 교회의 선교는 우리의 고 백의 온전함에 속한다.’_레슬리 뉴비긴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난하기 전에, 또 우리를 서로 비교하기전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믿습니다. 서로 인정하고 도우며 또 상대방의 단점을 내 장점으로 채워주고 내 단점은 상대방의 장점으로 도움을 받으며 우리 공동체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맡겨진 이 도시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상대적이면 안됩니다.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모두가 소중하고 귀한데 사회가 상대적 평가를 하기 때문에 내 사랑하는 아이가 귀하지 않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라도 당신의 말씀으로 마음이 회복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상대적인 존재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바뀌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시를 섬길 수 있도록 부름받았다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의 처지나 현실만 볼 것이 아니라 물론 더 준비되고 갖추어가려고 노력하겠지만 그러함과 동시에 우리의 모습으로 이 도시를 섬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사역을 해왔고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할 예정입니다. 비브릿지를 통해서도, 새롭게 개편된 남,녀전도회와 클로리를 통해서입니다. 나눔터는 함께 하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따듯하게 보듬어 줄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따라서 되어지는 일은 어떤 사역이 아니라, 어떤 무엇인가가 아니라 따뜻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고 은혜로 충만하여져서 죄를 회개하고 겸손함으로 주의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열매는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 따스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넘치는 은혜를 주실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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