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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찬양예배

2016-04-29 금요예배



2016-04-29 금요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2016-04-29 금요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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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후반에 한국교회는 급진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우리와 먼 다른 시간이 아니다, 바로 우리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교회들이 이 시기에 성장을 많이 이루었다.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21세기 사는 우리는 20세기 성장의 모두가 건전하고 우리가 또한 이런 것들을 계속 지속해야하는지를 이 시간에 생각해봐야한다. 왜냐면, 20세기에 대부분의 교회들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과적으로 기독교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우리는 복음을 잃어버린다고 말하면서, 정작 이유는 무엇인지도 모른채 절망하고, 무관심하고, 낙심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한다. 무언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디가 문제 생겼는지, 어디가 안 맞는지도 모른채 살아간다. 네덜란드 루니아라는 조직신학자가 개혁파적인 입장에서 20세기 교회에 나타난 목회적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교회는 자주 잠들어 있고, 신앙고백 등의 기준들이 무시, 개정, 거부되는 것을 조금도 주의해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는 노골적으로 교리를 설교하지 않았다. 교리를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긴다.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교리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했다.

교회에서 진정한 권징이 시행되지 않았다. 권징은 참된 교회의 표징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400년간 권징이 무시되었고, 권징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느날부터 교리라른 말이 교회에서 점점 사라진다. 심지어 교리가 무엇인지, 교리가 우리의 신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교리는 신학자나 신학생들만 하는 딱딱하고 크게 쓸모없는 학문정도로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많은 성도, 목회자, 심지어 신학자들가운데도, 교리와 신앙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 나 편한대로 신앙생활하며 살아가게 놔둔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방종, 심지어는 죄를 지으면서 복음안에서의 자유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가스펠 교회는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된다.

 

우리가 교리를 상실한 것은 한 개인이나 한 교회의 문제가 아니고 전체 구조적인 문제인데, 교회가 성장하면서 불균형한 감정적인 신앙, 치유목적의 신앙, 일회성 행복중심의 신앙만을 강조하고, 신학을 배제시킨 결과이다. 신앙과 신학이 다르다고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거기서 배운 목회자들이나 지도자들이 또 그렇게 성도를 가르쳤다. 칼빈의 말로 하면 이것은 자기파멸의 지름길이고 무지의 결과라고 한다. 신학과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꼭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럼 신학이 신앙 위에 있다는 말이냐?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학은 인간적인 것이야 라고. 누가 우위에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신학은 신앙이 전제되어야 하고, 신앙은 신학으로 체계회되고 설명됨으로써 완전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앙과 신학은 다른 것이 아니고 동시적이고 일체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서 나오는 교회를 무시하고, 부분적인, 균형을 잃은 신앙생활을 한다면 신앙과 교회는 왜곡되고 변질된다..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칼빈:“ 교리란 교회를 중심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적 삶의 지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요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교리란 무엇일까? 교리는 신앙의 체계적 이해와 정립니다. 교리화작업이 곧 신학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성경을 믿는다. 신앙은 다시 성경을 요약, 체계화하여 교리(신학)를 만들고, 그 교리는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고 체계적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사실 교리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에 그렇다. 성경의 말씀들을 근거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한 규범, 지침같은 것들을 만들어, 우리의 인간적인, 죄적인 마음과 생각, 언행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단 사이비로 가는 것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교리는 우리의 신앙고백과 같은 것이다. 많은 중요한 교리가 있는데,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해 잘 정리되고 요약된 것 중에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이다. 웨스트민스터에 대한 배경을 지난주 금요일에 임대영 준목님이 설명을 했다. 특히 우리 대학생이나 청년들은 문답의 주요내용을 탁 캐치해서 노트에 짤막하게 정리할 필요도 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 문답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것인데, 먼저, 지난주 했던 1문답을 함께 읽어보겠다.

 

1문 인간의 최고의 목적이 무엇인가?

: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줄거워하는 것인가? 에 대한 답을 2문답에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2문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어떤 규칙을 주셨는가?

: 구약과 신약 성경에 함의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하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유일한 규칙이다.

 

답은 바로 성경이다. 왜냐면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신앙생활하는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첫째,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자연계시란 무엇인가?

로마서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과 역사,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진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우리가 종교의 씨앗이라고 많이 표현한다. 모든 인류에게 이 종교의 씨앗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알고싶어 하도록 창조되었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은 각자 다른 우상을 만들어내고 종교적 가면을 쓰고 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머리숙이고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로 시작한다. 이렇게 원래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멋진 산과 숲을 보면서,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보면서, 귀여운 동물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또 하나님을 예배함을 자연스럽게 알고 할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의 결과로, 즉 하나님이 있어야할 자리에 자신을 앉히는 어리석은 짓을 했기에 이 타락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다. 이 타락으로 더 이상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해야 한다는 인간의 본능과 인간의 권세를 상실했다. 영적인 눈과 귀가 어두워진 인간은 육신적인 것만 보이기에, 다시 타락전 인간의 모습을 되찾기에는 자연계시,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보고 다시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이 자연계시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기에는 불충분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특별계시를 주셨다.

 

2. 특별계시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특별계시란 성경이다. 죄인된 인간이 죄에서 구원을 받고, 다시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성경이 알려준다, 구원받고도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고싶어하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는지 성경이 알려주고 있다.

성경,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 아래, 현재의 모든 구약과 신약이 포함되어 있다. 구약은 몇권? 39, 신약은? 27. 이렇게 총 66권이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타락한 인간에게 자연계시로 다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받기에 불총분하다. 반면 특별계시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고, 구원의 유일한 통로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깨닫고 믿게 한다.

 

둘째, 성경은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다시 소요리 제2문답으로 돌아가서 다시 읽어 보겠다.

 

2문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어떤 규칙을 주셨는가?

: 구약과 신약 성경에 함의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영화롭게 하며 즐거워하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유일한 규칙이다.

 

성경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유기적 완전 축자 영감.

22:18-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여기에 함의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함의를 여러분들이 오해하면 안 된다. 함의했다고 해서 성경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있다는 말이아니다. 이 함의라는 단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것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표현할려고 함의라는 단어를 썼다.

 

왜냐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하여, 성경에 권위에 대하여 반기를 들기 때문이다. 주로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와 큰 차이가 있다.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고, 성령의 감동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보는데, 많은 신학자, 목회자, 이단 사이비들은, 성경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예수님의 기적과 관련된 성구들은 성경에서 빼야 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물위를 걷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르네상스 이후에 신본주의가 인본주의로 바뀌었다. 이성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합리적, 이성적, 철학적인 사고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가진다. 그래서 이성과 합리성과 반대되는 것들을 거부한다. 그래서 성경을 난도질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어느 철학자,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이 이러이러한 말을 했더라 하면 쉽게 믿고, 설득력 있고 뭔가 있어보인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성경 몇장 몇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라고 하면, 웬지 역사와 상관없는 것 같고, 웬지 무식해보인다고 느낀다. 관연 인간 스스로 여기는 합리와 논리와 이성이 하나님이 볼때는 어떤 수준일까?

 

두 번째, 성경은 우리가 은혜받을때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이다. 그래서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어제는 이 구절이 은혜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오늘은 이 구절이 은혜가 안되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러분의 신앙을 한 번 돌이키기 바란다. 우리도 이런 실수를 범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지 않아도 성경은 성경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 내가 은혜받았다고 내가 감동받았다고해서 성경이 성경되는 것은 아니다. 더 말하자만, 우리가 좋아하는 창3:15, 16:16절 같이 성경의 핵심을 명확히 말하고 우리가 많이 듣고 좋아하는 구절만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아니다. 성경 전체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몽땅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가 은혜가 없고 응답이 없다고 이 말씀이 죽은 것이 아니다. 내가 성경을 안 본다고 성경이 죽은 것이아니다. 불신자들이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 때,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과정에 동참하고 참여하지 않았을 뿐, 성경은 살아서 지금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 번째가 바로 성경은 유기적 완전 축자 영감이다. 우리가 취하고 우리 교회와 교단과 모든 장로교회가 믿고 따르는 교리이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성경 각권의 저자가 다르다. 창세기는 모세가 기록했고,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했고, 로마서는 바울이 기록했다. 인간저자는 각 다르고, 모세와 누가와 바울이 글 쓰는 방식이 다 다를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영, 하나의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았고,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기록했다. 그리고 완전이라는 말은 범위를 말하고 있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구절 한구절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가끔 성경에 오류가 발견된다. 이것은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하면서 오류가 생긴것이지, 성경 원본에는 오류가 없다. 그래서 원본을 보기위해 신학생들이 구약 원래 기록된 히브리어, 신약의 헬라어를 공부하는 것이다. 그럼 성경이 이렇게 한글자 한글자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무오한것이라고 누가 증명하나? 성경은 성경 스스로가 증명한다.

 

2. 성경은 명료하다.

성경이 명료하다는 말은, 성경은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성도든, 교역자든 학자이든 누구든지 볼 수있다는 말이다. 세상의 서적들은 카테고리가 분명하고 수준에 맞게 내 전공에 맞게 보지만, 성경은 내 수준이나, 내 이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보는 것이기에 누구든지 볼고 누구든지 은혜받고 누구든지 성경을 보고 구원을 받을수 있다. 그런데, 성경은 오직 학자만, 오직 목사만 읽는 시대가 바로 중세시대였다. 그것을 타락이라고 했고,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것이다.

 

3. 성경은 충족하다.

가톨릭은 성경과 함께 전통을 말한다. 현대신학자들은 성경과 함께 이성을 말한다. 성경은 더 붙힐 것도 뺄 것도 없다. 서론에서 교리를 말했지만, 교리도 마찬가지다, 교리도 성경에서 나오고 성경으로 돌아갈 때 우리가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열정이나 열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겠지만, 늘 성경 말씀으로 하나님 음성을 확인하고, 잘못됬으며 또 돌이키고, 회개해야한다.

 

성경은 충족하다라는 말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연구하다가, 연대가 안 맞거나 순서가 안맞다고 성경을 의심하고 비난하는데, 성경에는 창조도 있고, 역사도 있고, 역사적 사실도 기록되어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성경은 역사교과서나 창조교과서, 과학교과서가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기에 충분한 말씀들을 성경에 기록했다는 말에 있어서 충족하다는 말이다.

 

결론을 맺겠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반드시 성령이 역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반드시 성령이 역사한다. 여러분들이 성령의 역사를 느끼고 싶다면 말씀이 있는곳에 여러분이 있으면 된다. 주일날, 강단에서 사탄의 시스템, 죄의 시스템 대신 말씀 시스템이라고 목사님이 설교하셨다. 말씀 시스템속에 여러분이 있을려면, “하나님 말씀시스템속에 살게 해주세요.” 기도만 하면 안된다. 말씀과 관련된 그 자리에 앉아있고,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예배의 자리에 있고, 그 말씀에 여러분의 마음과 귀를 열어서 듣고, 여러분의 눈으로 말씀을 확인하면 된다. 한번 듣고 한번 보는 것으로 부족하다. 우리는 늘 죄의 영향아래, 이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늘 낙심하고 병들고 우울하고 힘들다. 그래서 말씀을 다시 곱씹고 다시 감동받고, 다시 뉘우치고 다시 기도하는 자리를 가져야한다. 이 시간이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목사님이 묵상일기를 쓰라고 한다. 이것이 말씀시스템이다. 말씀시스템속에 있으면 여러분들은 자연스럽게 성령이 역사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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